쇼팽: 연습곡 op. 10 & 25 김정원 (피아노) 지난번 스케르초와 바르카롤 음반을 출시하면서 매우 인상적이고 뛰어난 쇼팽 해석을 보여주었던 김정원의 두 번째 쇼팽녹음은 난곡 연습곡집이다. 루빈슈타인이 결국 전곡녹음을 남기지 않았고 많은 쇼팽 전문가들이 녹음을 남기면서도 여간해서는 큰 임팩트를 주기 힘든 곡이기도 한데 코르토의 역사적 녹음 (EMI)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 폴리니 (DG)와 아쉬케나지 (DECCA)의 극히 상반된 두 가지의 탁월한 해석이 나오면서 이후 뒤샤블 (ERATO), 로르티 (CHANDOS), 베레초프스키 (TELDEC), 부닌 (EMI), 루간스키 (ERATO), 페라이어 (SONY) 등이 주목할 만한 연주를 한 바 있다. 주지적 연주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폴리니의 해석은 쇼팽의 많은 곡 들 중에서도 특히 상성이 좋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해석은 분명 (어쩌면 의외로) 코르토의 해석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아쉬케나지는 프랑스 레퍼토리를 특기로 했던 네이가우스의 쇼팽과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는데 폴리니의 충격적인 연주가 등장한 후의 전체적으로 주지적 해석을 강조하는 경향이 많은 가운데 부닌이 아쉬케나지와 비슷한 느낌의 해석을 내놓았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김정원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현대의 대세인 주지적 해석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로르티, 뒤샤블 등과는 달리 약음의 유연한 표현에 두드러진 강점을 가지는 연주로서 대단히 균형잡힌 쇼팽을 들을 수 있다. 녹음은 2003년과 2004년 슬로바키아의 FATRA Zilina에서 이루어졌다. 음반에는 EMI 로고가 STOMP CLASSICS와 같이 있긴 하지만 국내 발매만 이루어졌으며 추후의 인터내셔널 발매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연습곡 op. 10 제 1곡 Allegro, 1분 49초의 매우 빠른 템포. 폴리니의 연주가 사실상 레가토로 들리지 않을만큼 완전히 분리된 느낌의 터치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김정원의 아르페지오는 흐르는 듯 한 레가토이다. 왼손이 강조되지 않고 – 특별히 액센트를 주지 않는다 – 오른손 넷잇단음표의 첫머리마다 붙는 액센트도 필요이상으로 강조하지는 않지만 17마디째부터 자연스럽게 힘을 빼 주는 부분이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인상적이다. 좋은 음질로 듣지 못해 정확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몇 년 전 김정원의 쇼팽콩쿨 예선실황 음원을 들었을 때와 매우 유사한 해석이다. 호방하지는 않지만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1번. 2번 Allegro. 연주시간은 1분 24초. 왼손의 스타카토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오른손의 레가토가 살짝 묻히는 느낌이다. 19마디에서 1곡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힘을 빼는 부분이 훌륭하며 이후의 크레센도는 폴리니의 기계적인 강약조절과는 달리 상당한 융통성을 가지고 힘을 억제한다. 김대진 선생의 쇼팽연주에서 포르테를 무척 아낀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김정원의 연주도 포르테를 무척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곡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 한데, 32 - 35마디의 디미누엔도를 거쳐 나직하게 주제선율이 돌아오는 부분, 43마디부터 곡의 종지까지 각 악상의 특징이 하나하나 잘 들리는 해석. 앞에서 언급한 스타카토의 영향도 있고 화성으로 연주되는 넷잇단음표의 첫음들이 꽤 묵직하게 연주되고 있어 폴리니나 아쉬케나지처럼 대단히 섬세한 느낌은 아니다. 3번 Lento, ma non troppo. 연주시간 4분 18초. 선율이 연주되는 A부분에서도 매우 제한된 루바토만을 적용한다. 프레이즈의 첫 음, 혹은 액센트가 붙은 높은 음의 바로 앞부분에 살짝 리듬을 늦춰주는 정도. 따라서 감상적인 느낌이 적고 담담한 진행이다. Poco piu animato의 중간부는 연습곡집 전체의 연주경향에 비추어보아 의외로 덜 공격적이다. 5-6도의 연타, con bravura의 격렬한 악상에서도 템포가 빨라지거나 악상이 격해지지 않는다. 4번 Presto. 역시 1분 58초로 매우 빠른 템포를 취하고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굉장히 빠른 템포에서도 오른손-왼손이 이어받는 악상들의 흐름에 전혀 위화감이 없다. 양손 악상이 교차하는 부분의 공격적인 처리, 격렬한 선율에 대한 적절한 감정이입 등 전혀 흠잡을데 없는 훌륭한 연주. ff의 격렬한 코다 시작부분의 왼손갤럽이 더 과감했으면 훨씬 좋았겠지만 어디까지나 필자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5번 Vivace. 1분 40초. 호로비츠의 연주와 거의 같은 속도이지만 훨씬 빠르게 들리는 것은 완전한 레가토 주법때문이리라. 2번과는 달리 전반부에서는 왼손이 매우 여리게 연주된다. 전체적으로 다이내믹이 크고 오른손의 돌돌 구르는 듯 한 악상을 전혀 부족함 없이 잘 표현하고 있다. 34마디째부터 크레센도가 계속되는 d플랫-e플랫음의 옥타브를 오르내리는 트릴의 연주는 지나치게 레가토에 힘이 충분하지 못해 똑부러지는 느낌은 아니며 55마디째의 poco rallentanto – deliato - smorzando악구도 너무 급격하게 감속시키지 않았나 생각된다. 7번 Vivace. 1분 37초 모처럼 화끈한 크레센도를 연주한다. 대신 delicato악구를 아주 sotto voce로 연주한다거나 주제선율의 두 음씩 반복되는, 혹은 동가의 화음이 연속해서 반복되는 부분의 연타음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선율의 흐름을 흐르듯이 따라가는 연주. 그래서인지 마지막 6마디에서는 좀 더 신나게 두들겨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느껴진다. 8번 Allegro. 2분 19초. 난곡 중의 난곡이다. 단순해 보이는 흐름속에 갖은 고난도의 기교가 동원되는데 모든 악상을 veloce로 연주하면서 빈번한 액센트(1, 2곡과 마찬가지)가 등장하고 후반부에는 legatissimo로 연주되는 섬세하고 우아하면서도 극히 화려한 패시지가 등장하는데 김정원의 연주는 후반으로 갈수록 빛을 발한다. 초반부의 벨로체악구는 솔로몬이나 루간스키에 비하면 썩 유려한 흐름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중반부 이후에 극히 유연하게 전개되는 여린 악구들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을 정도. 9번 Allegro, molto agitato. 연주시간 2분 7초. 풍부한 페달의 사용 덕에 왼손의 울림이 부드럽고 분리되지않은 하나의 화음 같은 인상을 준다. 중간에 잠시 선율이 노래하는 부분에서도 특별히 감정을 이입하지는 않으며 appasionato 악구, 후반부의 크레센도에 동반되는 stretto악구 역시 기계적으로 감정이 억제되어있다. 무뚝뚝한 이 곡의 개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10번 Vivace assai. 2분 02초. 난해한 무궁동악곡. 빠른 템포로 생동감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전체적인 경향이긴 하지만 크레센도-디크레센도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으며 조옮김이 있는 부분을 표나지않게 이어붙이는 듯 한 표현을 하고 있는 부분을 주목할 만 하다. 다이내믹하고 흠잡을 데 없는 매우 좋은 연주. 11번 Allegretto. 2분 28초. 이 곡에 관한 한 필자는 아쉬케나지의 연주를 전폭 지지한다. 마찬가지로 부닌의 연주도 좋아하는데 김정원의 연주는 폴리니의 해석에 더 가까우면서 약간 템포를 늦추고 터치를 부드럽게 하면서 균형잡힌 해석을 하고 있다. 아르페지오의 속도는 매우 이상적인데 페달을 좀 더 많이 밟아주고 울림을 더 많이 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쉬케나지의 연주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까.. 12번 Allegro con fuoco. 2분 27초. 연주의 느낌은 presto agitato. 뜻밖에 매우 흥분된 왼손 악구를 들려준다. 프레이즈 사이에 여백을 주지도 않고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강인한 스타일이며 폴리니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받았던것과 비슷한 강한 임팩트를 가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폴리니의 해석을 그만큼 많이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연주이다. 연습곡 op. 25 1번 Allegro sostenuto. 2분 27초. 오래 전에 키신의 신보 중 베르쇠즈를 리뷰하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필요없다’는 멘트를 한 적 있는데, 이 곡에 대해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김정원은 훌륭한 테크니션이고 쇼팽콩쿨 갈라 콘서트에 초대받았을만큼 쇼팽해석에 능한 피아니스트인만큼 이 곡의 아름다움을 전혀 부족함 없이 전해주고 있다. 전반부에서는 분산화음들의 일체감을 부드럽게, 후반부에서는 꽤 단호하고 강한 선율들이 나타난다. 크레센도와 appasionato악구의 강인한 해석, 왼손 저음에 대한 적절한 페달링 등, 곡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아주 좋은 연주. 2번 Presto 1분 39초. 섬세하고 전체적으로 그늘이 진 곡이다.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곡이어서 서투른대로 자주 연주하는 곡이기도 한데 감성적인면 보다는 악보 그대로를 충실히 표현하면서 선율과 강약이 가진 최소한의 감정전달만을 취하는 주지적 연주. 폴리니와 매우 유사하다. 3번 Allegro. 2분 03초 문자 그대로 놀라운 연주. 음색, 리듬감, 32분음표 트릴의 완벽한 처리와 고음의 깔끔한 울림 등 최근 발매된 연습곡 음반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연주라고 할 수 있다. 반복부의 대담한 espressivo를 대담하게 루바토처리하면서 강조하는 부분, 마지막 세 마디의 사라지는 듯 한 트릴의 표현에서도 쇼팽 음악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4번 Agitato. 1분 44초 Op.10-9에서도 그랬듯이 김정원은 담담한 느낌의 곡은 무척 객관적인 시각에서 연주하는 듯 하다. 군더더기 없이 무뚝뚝한 악상을 좋은 타이밍에 끊어주면서 진행한다. 6번 Allegro 2분 13초. 유명한 3도 연습곡.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전체적인 강약의 진폭이 악보상에 (그냥)보이는 것 보다 큰 편이다. 아주 빠른 템포는 아니며 소리도 날카롭지 않게 잘 다듬어져 있다. 왼손의 선율은 의외로 강조되지 않는 편. 최후의 12마디 직전 하강 3도음형을 단호하게 강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8번 Vivace 1분 11초. 그다지 빠른 템포는 아니다. Molto legato의 느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페달때문인지 왼손의 움직임은 의외로 부드럽다. 6도의 셋잇단음표 움직임을 꽤 강조해서 들려주고 있으며 마지막 5마디의 상승 크레센도는 정말 의외로 격렬하다. 9번 Assai allegro. 또한 1분 06초로 꽤 느린 편이다. 쇼팽의 연습곡집에서 속도지시기호가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assai allegro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지시를 충실히 따른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데 아쉬케나지나 부닌 또한 템포지시에 얽매이지 않고 녹음에 임한 것을 생각하면 악상이 지는 잠재적이고 다양한 아름다움이 지닌 가능성이 매우 많은 곡이다. 짧은 기간이라 이 템포가 가지는 장점에 대해 충분히 파악할 만한 시간을 가지지는 못했다. 지휘자 아르농쿠르가 가끔씩 취하는 것 처럼 2/4박자의 리듬은 약간 느린 편이 액센트가 강조되고 청자 이상으로 연주자를 즐겁게 해 주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10번 Allegro con fuoco는 이 음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단한 연주이다. 4분 17초의, 폴리니(3분 58초)에 비하면 다소 느린 속도인데 약간은 투박한 느낌이 들 정도로 거칠고 격렬한 해석이다. 5마디부터 시작되는 셋잇단음표 사이의 지속음(이 연습곡의 핵심이지만..) 처리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을 듯 싶다. 교과서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모범적인 처리에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폴리니의 해석이 이미 35년이나 지났다는 점이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주지적이면서도 강렬한 해석이다. 2분음표를 중간에 넣고 6음씩 이어서 연타하는 마지막 부분의 긴박한 해석도 인상에 남는다. 11번 Lento-Allegro con brio. 3분 32초. 폴리니의 연주시간과 동일하며 곡의 격렬함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강약의 대비가 다른 곡들에 비해 뚜렷하고 쉴새없이 움직이는 오른손 악구는 약간씩 힘을 빼는 듯 한 느낌으로 왼손과의 밸런스를 잘 유지한다. 곡을 풀어나가면서 특별히 드라마틱한 느낌을 강조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프레이즈가 바뀌는 부분에서 약간씩 여유를 두고 연주하기 때문이다. 12번 Allegro con fuoco. 2분 37초. 10마디 정도 진행 후 E플랫을 유니즌으로 하는 연타음의 효과는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데 흥분하기 쉬운 이 곡을 다소 냉철한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악보가 가지고 있는 격렬함은 빠짐없이 표현해주는 비범한 해석을 들을 수 있다. C단조의 기본화음으로 끝맺는 마지막 부분에서 폴리니처럼 강렬한 종지를 기대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그 정도의 진폭을 염두에 두고 연주한 것은 아니며 21세기의 녹음컨셉 또한 30년 전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총평을 하자면 최근 발매된 모든 쇼팽 연습곡 음반 중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쇼팽 해석을 많이 도입한 연주라고 할 수 있겠다. 스튜디오 녹음인 만큼 완성도는 대단히 높다.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쇼팽콩쿨실황 녹음들과 비교해 봤을 때 보다 안정된 느낌은 들지만 해석상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당시 내용이 궁금했었던 분들에게도 많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피아노를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중요한 곡인데, 김정원의 해석은 루간스키 (ERATO)와 더불어 아쉬케나지-폴리니의 장점을 골고루 받아들인 것으로서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모나거나 무너지는 부분이 전혀 없는 음색 또한 흠잡을 데가 없는 빼어난 녹음이다. - 김태우 글쓴 날짜: 2005/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