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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서거 250주년 특별 기념음반

21세기 바하, 시간과 공간의 확장 /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자연과의 교감

1705년 10월, 아른시타트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바하는 유명한 오르가니스트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를 듣기 위해 길을 떠났다. 산새소리를 들으며 시골길을 걸어가는 청년 음악가의 가슴속에는 음악에의 열정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다가 뛰기도 했다. 잠시 나무 밑에서 쉬며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렇게 아른시타트에서 뤼베크까지 가을의 들녘을 지나고 시냇물을 건넜다. 공해 없고 인적 드문 산길을 걷는 청년 바하의 느낌이 어땠을까. 우리는 스무살의 젊은이가 산길을 걸으며 자연과 교감했음을 알 수 있다.

아이엠에프 경제위기가 우리나라를 엄습하던 겨울 아침. 나는 집에서 16킬로미터나 떨어진 읍내의 목욕탕을 향해 걸었다. 너무나도 맑은 겨울날, 차갑지만 상큼한 겨울 바람은 내 뺨을 어루만졌고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나는 작은 CD 플레이어를 가슴에 품고 이어폰으로 바하를 들으며 갔다. 바하에 내 호흡을 맞추며 걷는 내 발길은 가벼웠다. 나는 북스테후드의 음악을 들으러 아른시타트에서 뤼베크로 가던 청년 바하의 발걸음을 생각하며 걸었다. 아는 이들이 차를 세우고 타기를 권했지만 나는 미소로만 답할 뿐 차에 오르지 않았다. 지고한 느낌을 받으며 걷는 황홀한 격정이 차에 오르는 순간 사라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있었다. 주제에 이어 나타나는 변주를 듣고있노라면 마치 여행을 하는 것과 같다. 색다른 모습의 선율이 나타나지만 결코 일관된 느낌을 잃지 않는 것이 새로운 풍광이 지속적으로 펼쳐지는 여행과 같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여행이었다. 내면으로의 여행-. 나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격정에 휘말려 지속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바람이 오히려 싱그럽게 느껴졌다.

21세기 바하에 새로운 방향 제시

바하의 음악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새롭게 변신했다. 많은 음악인들이 바하의 오리지널 작품에 자신의 이미지를 넣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클래식 연주자들은 부조니가 편곡한 바하를 즐겼고 팝과 재즈 아티스트들도 바하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특히 재즈에서 바하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즉흥성을 중시하는 재즈 연주자들에게 있어서 바하는 쉽게 교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었다. 필자는 `그 무엇`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바하 음악의 지고함과 존엄함의 이면에 있는 `그 무엇`은 어떤 것일까.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고 기악곡에서조차 종교적인 느낌이 감도는 바하의 영혼을 쥐고 있는 것은 바로 신(神)이었다. 이는 섭리라고 표현해도 좋고 자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복과 화를 주는 인간적 모습의 신이 아닌 근원적 생명과 무한한 사랑을 창조한 신의 숨결이 바하의 음악에 담겨있다.

바하는 프로테스탄트였지만 그가 찬양한 신은 특정종교의 신이 아니었다. 그는 카톨릭 미사곡도 작곡했다. 그가 만든 교회 칸타타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음악은 물론 그의 모든 작품은 지고한 신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다. 신은 교회 밖에도 존재한다. 이에 대해 바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비록 카이저링크 백작의 불면증을 위해 작곡된 곡일망정 바하의 내면에서는 신의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그 본질은 생명에의 찬가였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치열한 음악적 구도를 했던 존 콜트레인의 음악이나 슬픔과 해학의 극한까지 추구하는 우리 판소리가 다른 음악이 아닌 것이다.

바하의 음악이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은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재즈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바하에 투영했고 팝 아티스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클래식 분야에서도 바하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본 앨범은 21세기 바하의 모습 가운데 한 방향을 제시한다. 시코베츠키의 편곡은 이미 그 미학을 입증 받아 클래식 애호가들에게는 익숙한 작업이다.

바하는 자신의 작품은물론 다른 작곡가의작품까지 많은 편곡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바하 자신도 자기의 작품이 후세에 많은 편곡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오케스트라 버전으로의 편곡은 쉽게 예견할 수 있다. 재즈의 탄생을 예측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시대에 따라 새롭게 나타나리라는 예견은 가능했으리라.

달콤한 낭만이 가미된 새로운 이미지

본 앨범에는 시코베츠키의 스트링 오케스트라 편곡 외에 재즈 버전으로 피아노 솔로 혹은 피아노와 베이스의 연주가 삽입되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리아(주제)와 서른개의 변주라는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형식이 스트레이트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재즈버전이 간간히 자리바꿈을 하며 나타나는데 이것이 전체 형식을 파괴 혹은 왜곡시키고 있다. 대단한 발상이다.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흐르는 대형구조의 원곡을 확장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 자체가 놀랍다. 스트링 편곡 자체만으로도 위험성이 있는데 바하가 이루어 놓은 형식까지 파괴한다는 것은 실로 대담한 일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대단히 크다. 재즈 버전의 삽입을 통해 앨범 전체가 새로운 느낌으로 변했다.

자크 루시에 트리오가 연주한 `재즈 바하`에서는 20세기에도 살아있는 바하의 그림자를 본다. 전자악기로 연주되는 바하나 록 뮤직에서 나타나는 바하 역시 바하의 실체는 가리워지고 편곡 혹은 연주자들의 이미지가 우선한다. 그러나 본 앨범에서는 바하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시코베츠키의 편곡을 바탕으로 간간히 나타나는 재즈버전은 전체의 조화를 손상시키는 법 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다.

원곡인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건반을 위한 작품이라는 점이 피아노를 위한 편곡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은 분명하다. 대위법적이고 엄격한 틀에 의해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 피아니스트는 낭만적인 서정을 불어넣었다. 재즈적인 표현은 이 위대한 작품에 달콤한 분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원작이 지니는 품위에는 손상이 가지 않았다. 오히려 격이 떨어지지는 않으면서도 친근한 바하가 탄생했다. 이로써 바하를 통한 새로운 여행이 가능해졌다.

시코베츠키가 클라비어를 위한 바하의 원곡에서 현악기의 다양한 유희를 보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바하의 음악적 상념에 종속된 것이다. 여기서 시코베츠키의 편곡작업은 그것이 뛰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창조작업이라기 보다는 변형의 미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재즈 버전에서 칼만 울라의 피아노와 미니 슐츠의 베이스는 자신들이 바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탕으로한 주관적 의식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이로써 본 앨범은 `바하의 편곡`이라기 보다는 `바하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미학을 창출했다. 바하가 창조해낸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21세기라는 현대의 관점에 맞게 새롭게 정의한 것만으로 그 사명을 다한 앨범이 아니다.

시냇물과 산새소리보다 우리에게는 백화점과 지하철의 소음이 익숙하다. 바하가 살던 시대와는 엄청난 변모가 생겼다. 그렇다고 우리 삶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문화는 당시대의 삶의 모습이고 음악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대변한다. 이런 점에서 본 앨범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바하라는 숭고한 정신세계를 지닌 선인의 위대성을 시대에 맞게 음미한다는 의미를 제공한다. 예술에 있어서 항상 전통의 계승과 발전이라는 측면이 대두되는 것은 머물어있을 수 없는 삶의 형태와 무관하지 않다. 저마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지구 반대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바하는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왔다.